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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가족심리/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by 안개속의 풍경 2023. 10. 23.

길버트 그레이프 (1993)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개봉 이후 많은 관객들에게 주연을 맡았던 조니 뎁과 신인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발견하게 해 주었다. 또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가족의 의미와 자신의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했다. 그 후로는 많은 심리학 분야에서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를 연구 주제로 다루면서, 한 개인의 행복에 가족이 미치는 영향과  '가족 심리 치료'의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감독 라세 할스트룀
각본/ 원작 피터 헤지스/ 피터 헤지스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
출연 조니 뎁, 줄리엣 루이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개봉 1993년 12월

 

 길버트 그레이프의 삶에서 가장 버리고 싶은 것은... 가족?

몇 해 전인가 한 개그맨이 예능 프로에서  '삶에서 가장 버리고 싶은 것은?'이라는 질문에 '가족'이라고 대답했고 , 출연자 모두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약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 다들 크게 웃어댔다. 그 정적은 다른 출연자들도 각자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싶었던 순간이 떠올라서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마 우리 모두 가족을 내 어깨에 , 혹은 내 마음속에 무겁게 매달려있는 짐이라 여겨본 적 있을 것이다.

길버트에게는 누가 봐도 무거운 짐이라 인정할만한 가족이 있다. 폭식증에 걸려 초고도비만이 되어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서 자식들의 돌봄을 받으며 살아가는 엄마, 잠시만 한 눈 팔면 어딘가 높은 곳에 올라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지체장애 동생 어니, 그 짐을 함께 나누고 있는 누나, 평범하면서 지독하게 사춘기를 겪고 있는 여동생, 어느 날 갑자기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가족의 곁을 떠나버린 아버지, 뒤이어 역시 갑자기 가족을 떠나버린 큰 형. 이들이 길버트의 가족이다.

하지만 길버트는 늘 어둡지 않은 , 덤덤하고 , 어찌 보면 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식료품점에서 일을 하고 , 퇴근하면 집으로 와서 엄마와 어니를 다정하게 돌본다. 길버트는 자신의 삶을 괴로워하지 않는다. 원래 자신의 삶은 그런 것이라 받아들여 버린 사람의 생기 없는 편안함이다.

길버트 그레이프, 자유로운 여행자 베키를 만나다

그렇게 늘 똑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길버트의 마을에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베키가 잠시 머물게 되면서 , 길버트는 혼란스러워진다. 그동안엔 어니를 돌보는 책임보다 더 선택하고 싶은 자신의 삶이 없었는데 , 이젠 언덕에 앉아 베키와 이야기 나누며 노을을 바라보는 시간이 어니를 목욕시키는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 된 것이다. 그렇게 가족을 자신이 짊어져야 할 형벌로 여겨 왔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해 버린 길버트는 어니에게 폭력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억눌린 울분을 터트린다.

하지만 어니를 짐스러운 장애아가 아닌 ,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대하는 베키를 보고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다. 어머니와 어니는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머니는 큰 슬픔을 견디지 못해 지금의 그런 모습이 되었지만 , 비만의 껍데기 안에는 타인에게 조롱당하고 싶지 않은 숭고한 영혼이 있다. 어니도 비록 장애가 있어서, 길버트의 돌봄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어니 삶의 전부는 아니며, 어니 또한 길버트에게 깊은 사랑을 주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도 자유로운 인간으로 서 본 적이 없는 길버트로서는 가족을 베키처럼 대하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만약 베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길버트는 음악 없이 춤을 추는 것만 같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마을 엔도라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18살 생일을 넘긴 성인이 되어버린 어니를 돌봐야 하는 일을 더욱 무거운 짐처럼 어깨에 지고 살아갔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인, 그들의 삶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삶은 달콤한 순간보다는 씁쓸하거나 고통스러울 만큼 매운 순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내 삶이 달콤하지 않을 때, 내 옆에 가족마저 나를 짐스럽게 여긴다면, 나는 더욱 쓰라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길버트가 될 수도 있지만,  길버트의 엄마나 어니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가 뚱뚱한 건 내가 원한 일이 아니야. 그냥 내게 일어난 일이야."라는 길버트의 엄마의 대사처럼 우리의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순간들이 있고, 그런 일은 그저 내게 일어난다. 

물론 엄마나 어니를 돌보는 일이 길버트의 족쇄가 되어 그의 자유로운 삶을 갉아먹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길버트의 입장이든, 엄마나 어니의 입장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과연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 나의 가족들인지, 혹은 그들을 핑계로 내가 내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솔직하게 봐야 한다. 내가 현재 상태에서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을 판단하고, 그들에게 분노 없는 솔직함으로 말을 건다. 그러기 위해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야 한다. 

 

길버트, 나를 찾아 떠나는 행복한 여행길 위에 서다

이제 길버트와 어니는 길 위에 서있다. 이번엔 지나가는 캠핑카 여행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들이 여행자가 되어 떠나기 위해서이다.

"We can go anywhere, if you want." 길버트는 어니에게 말한다. 아마 자신에게 해주는 말일 수도...

                                                               

영화 &lt;길버트 그레이프&gt;의 포스터